나와 칠리(콘 까르네)의 이야기....
다양한 음식에 감초처럼 두루 쓰이는 검증된 맛의 소스 중 하나가 바로 이 칠리, 정확히는 칠리 콘 까르네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핫도그에 올리면 칠리 핫독, 햄버거에 올리면 칠리 버거, 감튀에 올리면 칠리 프라이 등등 그 쓰임새도 다양하고 인기도 좋아 오랜 시간 동안 사랑받고 있는 음식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토마토+고기+매콤한 맛의 조합은 정말 맛이 없을 수가 없는 조합이죠. 향이 강한 음식을 좋아하지 않는 분들도 크게 튀는 향이 없어서 그런지 한국에서도 많이 좋아하는 맛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처음 이 칠리라는 음식을 접한 건 초등학교 시절이던 90년대 초반 동네에 생긴 웬디스라는 햄버거 매장에서였습니다. 삐삐 머리 소녀의 로고가 인상적이었던 웬디스는 지금 생각해 보면 조금 특이했던 것 같습니다. 그 시절 유행했던 프랜차이즈 햄버거 브랜드들과는 메뉴 구성이 달랐는데, 맥도널드, 롯데리아, 하디스, KFC 등에서는 햄버거가 메인이 되고 그 외에 이런저런 사이드 메뉴들이 중점이 되었던 것 같은데 이 웬디스는 셀프 샐러드바부터, 햄버거, 치킨, 칠리와 스파게티까지 조금은 패밀리 레스토랑 스러웠던 것 같습니다. 암튼 그래서 전 웬디스에서 항상 샐러드바와 스파게티, 그리고 칠리를 먹는 걸 좋아했습니다. 샐러드 볼을 크게 만들기 위해 양상추를 펼쳐서 어떻게든 다양한 토핑을 많이 담으려고 했던 기억도 나네요. 하지만 웬디스는 기본 가격대가 다른 버거 프랜차이즈 브랜드인 맥도널드, 하디스, KFC 등과 비교하면 조금 비싸서인지 몇 년 못 버티고 한국에서 철수하게 되어 한동안 다시 맛볼 수가 없게 되었죠.
그 사이 한국의 외식산업을 눈부시게 발전하며 정말 다양한 외식 브랜드가 생기고 브랜드마다 다양한 칠리가 나왔지만 어찌 된 지 단 한 개도 웬디스의 칠리보다 맛있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어준 칠리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이래서 첫 경험이 중요한 거 같아요.
그렇게 시간이 흘러 뉴욕으로 유학을 가고 생활을 하며 기억 속에 잊혔던 웬디스라는 브랜드가 생각이 나서 마침 홈스테이를 하던 동네에 매장이 있어서(뉴욕에도 웬디스는 매장이 별로 없더라고요) 반가운 마음에 찾아가 10년도 훌쩍 지나 다시 만난 웬디스는 제 기억 속의 웬디스와 조금 다른 느낌었습니다. 한국의 패밀리 레스토랑 같은 모습이 아니라 그냥 흔하디 흔한 패스트푸드 매장이었고 햄버거 패티가 원형이 아닌 사각형 모양이 독특했던 기억이 납니다. 하지만 제가 좋아하던 칠리는 여전히 있어서 바로 세트메뉴를 시키고 감튀를 칠리로 바꿔서 먹었는데 진짜 제 기억 속 바로 그 맛이 그대로였습니다. 그때의 감동이란.....
그 뒤로 시간이 또 지나 학교를 졸업하고 어찌어찌 뉴욕대 근처의 델리에서 알바를 하게 됐는데, 뉴욕의 델리는 한국의 편의점처럼 길 모퉁이마다 있어 발에 치이는 수준으로 많아 진짜 치열한 전쟁터 같았던 기억이 납니다. 이 델리에 스콧이라는 이름의 쉐프님이 계셨는데 홀푸드마켓의 총 메뉴개발 매니저 출신으로 현업에서 은퇴하고 용돈벌이로 이곳에서 일하고 계셨는데, 사정이 생겨 그만두게 되면서 제가 어찌어찌 이 델리의 총괄 쉐프가 되어(그래봤자 주방에 저 혼자) 맘 편히 알바나 하러 간 곳에서 이 델리를 이끌어 가게 된 기억이 나네요.
마침 그전에 정말 미친 듯이 바쁘고 규모가 큰 레스토랑에서 일을 하다 나온지라 이미 멘탈도 체력도 그 어떤 하드프레셔에도 견딜 수 있게 준비되어 있어서 자신이 있었더랬죠. 제가 해야 할 일은 매일 새벽 6시에 출근해 오전 11시까지 5시간 동안 8가지의 핫푸드와 6가지의 수프를 만들어 뷔페처럼 세팅하는 일이었습니다.
일 자체는 어려운 게 없는데 문제는 주방의 컨디션이 너무 열악해서 정말 시간관리를 못하면 시간 내에 모든 음식을 만들 수 없다는 점이 주문이 끝없이 밀려오던 전 직장과는 또 다른 허들을 만났던 기억이 납니다.(화구2개에 가정용 에어프라이어는 너무한 거 아니냐고) 매일 다른 종류의 8가지 핫푸드와 6가지 수프를 구성하는데 그 어떤 제약도 없고 모든 걸 제가 구성하면 됐기에 일단 보편적인 메뉴부터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사장님의 유일한 가이드는 핫푸드보다는 수프에 신경을 써줬으면 좋겠다가 다였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수프 6가지 중 치킨누들수프는 고정으로 하고 나머지 5가지를 크림수프, 스튜, 맑은 수프, 아시안 수프로 카테고리화 해서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정말 이때 원 없이 수프를 끓여 본 것 같습니다. 구글, 요리책, 지인 찬스를 동원해 레시피를 구하고 연구해서 이것저것 정말 다양하게 만들어 봤는데 그중에 칠리가 터져 버린 것이었습니다.
6가지 수프를 각 100인분씩 총 600인분을 만들어 세팅하는데 유독 칠리만 12시도 안 돼서 다 팔리는 인기메뉴가 되어버렸고 그래서 칠리도 고정메뉴로 들어가 제가 일하기는 더 수월해졌던 기억도 나네요. 그전에도 다양한 직장에서 수프를 많이 끓여 봤지만 한 그릇에 1.50불이라는 정말 저렴하지만 맛있는 수프를 끓여야 했기에 재료 돌려쓰기 신공을 비롯한 다양한 코스트 컨트롤 기술을 발휘했고 그렇게 몇 달을 델리에서 일하며 그동안 그 어떤 직장에서도 느껴보지 못했던 다양한 경험도 하고 델리의 매력에 푹 빠졌던 좋은 추억으로 남아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뉴욕에서 델리는 진짜 걷다 보면 끝도 없이 마주치게 되는데 마침 가게 길건너에 시티델리라는 나름 델리계의 럭셔리 고급진 델리가 있었는데, 당연히 손님은 시티델리가 넘사로 많았지만 수프만큼은 제가 일하던 델리가 그 시티델리를 비롯한 그 일대 모든 델리들 보다 월등하게 가장 인기 있는 매장이라는 사장님 피셜에 뿌듯했던 기억이 있네요.
이때의 사장님이 인연이 되어 나중에 비자사기를 당하게 되는 에피소드가 있지만 그럼에도 시간이 많이 지나서인지 지금은 좋은 추억처럼 저장된 것 같습니다. 이건 또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이야기를 풀어 보겠습니다.
문득 얼마 전에 단골손님께서 묵직한 쿠폰 보너스 음식 이벤트로 드시고 싶은 걸 여쭤보니 또 칠리를 만들어 달라고 하셔서 문득 깊은 곳의 추억들을 조금 소환해 봤습니다.
쓰다 보니 자랑 같은데 사실 제가 칠리 좀 칩니다.